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 프랑스,1814.10.04 ~1875.01.20)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이다. 또한 국내에서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작가이기도 하다.
밀레는 사실주의(Realism)와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그는 바르비종과 퐁텐블로의 아름다음 자연경관을 묘사하며 19세기 중반의 미술사를 장식했고, 이는 인상주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화가로는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 가 있다. 고흐는 밀레의 예술뿐만 아니라 삶까지도 자신의 모범으로 삼고 밀레를 따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대표적 화가다. 잘 알다시피 고흐는 밀레의 작품을 수 십 점 모작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클로드 모네의 작품들은 밀레의 풍경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고 구도나 상징적 요소 등은 쇠라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의 대표 화가인 박수근이 열두 살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만종(원제:L'Angélus)/1857~59년경, 캔버스에 유채, 55.5x66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만종은 그런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번역은 만종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원제 (L'Angélus)는 "삼종 기도"이다.
해가 저무는 저녁, 일터에서 감자를 캐던 중 종소리를 듣고 멈춰 서 삼종 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그림은 담고 있다.
국내에서 오르세 미술 전시를 열었을 당시 만종 앞에 서서 감탄했던 나의 이유이기도 한 이 그림의 특징은 주제가 주는 농촌 특유의 순박함, 편안함과 함께 밀레가 한평생 바쳤던 자연과 농촌에 대한 경외감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앞에서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너무나도 농부의 눈으로 잘 담아냈고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준다. 얼마나 위대한 자연인가!! 인간은 흙에서 태어났고, 흙을 통해 먹고, 흙에 기대 자고,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런데 농촌의 순박함과 자연의 대한 경외심,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이 그림은 현재까지도 괴소문에 시달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 그렇다고 믿고 있는 아기 시체가 있는 바구니 소문이다.
내용인즉슨, 처음 밀레가 그렸던 의도에는 감자 바구니 대신 아기 시체가 담긴 바구니(또는 관)였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이다. 이미 TV에서도 언급됐었고 인터넷에 만종에 대한 글을 보면 70%이상 이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우선 이 소문의 근원을 찾아보자.
바로 스페인 출신의 불세출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그는 밀레의 작품 중 특히 [만종]에 집착하며 그 안에서 불안의 근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달리의 만종], [건축적인 달리의 만종], [갈리와 밀레의 만종]등 만종을 오마주하여 다수의 작품을 만들었고 만종에 대한 글과 책을 출판하기도 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만종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이 그림(만종)에서 이 고독한 황혼 녘 죽음을 암시하는 배경은 시의 텍스트에서 수술대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 이유는 지평선에서는 생명이 꺼져 가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언제나 인류를 의미해 왔던 경작지이자 살아 있는 실체적 살에 건초 쇠스랑까지 꽂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쇠스랑이 생산력에 대한 왕성한 욕망을 가지고, 정교한 메스가 절개하는 것과도 같은 특유한 자세로 스스로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림 속의 그 남자는 발기한 자신의 상태를 감추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있지만 창피하고 의심스러운 모자의 위치를 고려하면 오히려 그것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그와 마주 선 재봉틀, 누구나 알아볼 만큼 심하게 특성화된 여성의 상징인 재봉틀은 심지어 더 나아가 자기 재봉틀 바늘의 치명적인 카니발리즘적 속성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살바도르 달리, [밀레의 만종에 대한 편집증적 비평에 대한 해석-1933년 미노타우로스] 중에서"얼핏 보면 무의미하게 보이지만 그 환영들이 나에게는 [만종]이 돌연 존재했던 어떤 그림보다도 슬픔과 불안을 느꼈다"
"크레우스 곶을 거닐며 나는 공상에 잠기곤 했다. 거기서 진정한 지질학적 황홀경을 느끼게 하는 바위의 풍경을 즐기면서, [만종]에 나오는 두 인물이 제일 높은 절벽에 새겨져 있는 것을 상상했다. 공간의 구성은 원작 그대로지만 몸 전체에 깊게 균열이나 있고 침식돼서 많은 부분이 닳아 있는데, 그것이 오래된 원작을 바위 그 자체만으로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남자의 형상이 더 닳게 되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고 윤곽이 모호해지면서 놀랍고 무서운 느낌이 준다."
살바도르 달리, [밀레, 만종의 비극적 신화-1963년 발간] 중에서
하지만 그는 만종에 대해 슬픔과 불안, 성적인 편집적 해석에 대한 의견을 내비쳤을 뿐 그 어디에도 아기 시체에 대한 언급은 없다. 또한 [밀레, 만종의 비극적 신화-1963년 발간] 서문에서 루브르 조사를 통해 다른 밑그림 흔적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는 언급을 했을 뿐, 이것이 허황된 소문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건축학적인 밀레의 만종(원제:The Architectonic Angelus of Millet.)/1933년, 캔버스에 유채, 73x61cm,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ia, Madrid, Spain.]
밀레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이렇게 회고했다.
"[만종]은 내가 옛날의 일을 떠올리면서 그린 그림이라네. 옛날에 우리가 밭에서 일할 때, 저녁종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어쩌면 그렇게 우리 할머니는 한 번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우리 일손을 멈추게 하고는 삼종기도를 울리게 하셨는지 모르겠어. 그럼 우리는 모자를 손에 꼭 쥐고서 아주 경건하게 고인이 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했지."
즈느비에브 라캉브로 외, [밀레-창해 출판] 중에서
우리가 흔히 부르는 [바르비종파]는 바르비종의 작은 농촌마을에서 자연을 동경한 화가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자연의 위대함과 경외감, 그리고 그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을 다루는 위대한 농부들, 그들에겐 그것들이 전부였다. 그런 바르비종파를 대표하는 화가인 밀레가 과연 그 당시 사회비판적인 그림 그림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펼쳤을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앞서 언급한 그가 만종을 그렸을 때 어떤 마음으로 그렸는지 잘 알려주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만종 복원 작업 중 자외선 촬영 시 나무관이 보였다는 이야기이다.
일부 훼손된 [만종]의 그림을 복원하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서 1963년 자외선 조사를 하다 초벌 그림에서 상자로 보이는 희미한 밑그림인 스케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많은 이들에게 만종의 바구니가 아기 시체가 있는 나무관이 맞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는 결정적 이야기다.
비록 자외선 조사는 했다고는 하나 아기의 시체를 담은 관으로 특정 지을 수 있을 만큼 뚜렷한 스케치가 아니다.
또 유화의 특성상 전체적인 구도를 잡기 위해 스케치 형태의 초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다반사이기 때문에 그런 형태의 밑그림이 발견되었다는 사실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니며 그 사실이 아기 시체가 있는 나무관이라는 설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에서 만종으로 검색하면 대다수의 내용이 그런 허황된 소문이 진실인 듯이 적혀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잘못된 정보가 또 결국 새로운 이에게 전해지고 그렇게 알게끔 만든다.
이제는 정말 정확한 이야기가 전해질 때가 아닌가 한다. 그런 잘못된 이야기들이 결국 우리가 가장 많이 사랑하는 밀레의 명성과 작품성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8년 9월 5일에 작성한 네이버 블로그 포스팅을 옮겨와 보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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